보석 같은 추억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겨울. 이케부쿠로에서 십몇 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의 큰 교회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결혼식은 식순에 따라 웅장하게, 화려하게, 단정하게 진행되었다.
식이 진행되는 내내 야츠모는 이치지쿠를 찾았지만, 결혼식장 어디에도 이치지쿠는 없었다.
소년
시간은 꾸준히 흐른다. 누군가가 빨리 가길 기도해도, 느리게 가기를 바라도 똑같이, 속절없이 지나간다. 때 되면 눈보라가 쳤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벚꽃이 피었다. 벚나무가 연두색으로 변할 때면 거리에 학생이 파다했고, 갈색으로 변한 잎이 떨어지고, 다시 눈보라가 쳤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후지산 꼭대기의 만년설 모양도 조금 변했을 즈음, 이름을 버린 야츠모는 이케부쿠로 밖에서 마흔다섯이 되었다.
말 그대로, 이케부쿠로를 벗어나 새 삶을 만든 야츠모는 완전히 그 생활에 적응했다. 교외의 부유한 동네에서 야츠모의 ‘야츠모’라는 이름을 아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아마 어떤 이에게 야츠모를 아느냐 물어도, 그런 이름을 한 사내가 있느냐며 반문해 올 게 자명했다.
이치지쿠와 야츠모의 평행선 같던 인생은 결혼식 직전에 점으로 교차해, 영영 멀어지게 된 걸로 보였다. 입가와 눈가에 잔주름이 붙기 시작하고, 살아오는 동안 지었던 표정을 따라 얼굴이 굳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그런 이별쯤 받아들일 수 있다고 태연자약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두 사람 다 충분하게 노화를 경험했다.
이케부쿠로의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위치에는 여전히 비일상의 보트에 몸을 실은 이치지쿠가 있다. 위험한 소문에 여전히 고개를 디밀고, 사건의 주변에서 변함없이 드문드문 존재를 드러낸다. 이케부쿠로에서 나이에 맞게 철이 든다는 것, 변해간다는 것은 사회적 통념으로서 그리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이치지쿠는 평범한 도쿄의 사십오 세 남성 보통의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었다. 상투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동안이라거나, 젊게 산다거나.
그래서 오늘도 소재를 위해 걸음한 참이었다. 오랜만에 이케부쿠로의 밖으로, 일상이 지배하는 도쿄의 평범한 곳으로.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서 흘러들었다.
그리고 맹세컨대, 이치지쿠는 ‘야츠모’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도, 말도 한 적 없었다. 그 도시가, 그 사건의 중심지로 알려진 부촌이 이름을 버린 ‘야츠모’가 살고 있는 동네라면 이치지쿠는 향하지 않았을 테다. 그러나 이케부쿠로 밖으로 나서게 한 아주 오랜만의 사건은 이치지쿠를 ‘야츠모’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십몇 년이 지났지만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야츠모’가 거기에 있었다. 전혀 모르는 차림새를 하고.
눈길을 주거나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사십오 세의 이치지쿠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분명하게 눈을 마주쳤지만, 이치지쿠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걷고 있던 걸음을 같은 속도로 재촉했고, 잠깐 마주쳤던 시선을 다시 눈앞으로 끌어왔다.
하지만 ‘야츠모’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게 틀렸다면, 그동안의 안락한 생활이 ‘야츠모’를 방심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성큼성큼 긴 다리로 이치지쿠에게 다가온 ‘야츠모’는 부촌과 안 어울리는 큰 소리로 이치지쿠를 부르며 대뜸 팔목을 훔치듯 붙잡았다.
“야, 오오우나바라!”
“할 말 없어.”
참 우렁차군. 생각을 목 아래로 집어넣으며 이치지쿠가 대답했다. 예상했다는 듯이 바로 튀어나오는 부정의 말. 그러고는 반쯤 눈꺼풀을 내리뜬 차가운 시선으로 ‘야츠모’를 본다. ‘야츠모’는 방금까지 열챈 대화를 이어온 사람처럼 윽박질렀다. 고급 주택가의 언덕배기에 ‘야츠모’의 목소리가 짧게 메아리친다.
“너도 날 좋아했잖아.”
“…….”
“내가 널 좋아했듯이!”
‘야츠모’는 씨근덕거리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
“그런 마음 없었어.”
“웃기지 마.”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겠지. 소년, 언제 자랄 거야?”
이치지쿠는 명백한 멸칭으로서 소년을 꺼냈다. 반투명한 흰색으로 설경이 되기 시작한 도시와 이치지쿠의 여전히 희고 가벼운 차림새. 몇 겹이나 자신을 벗겨내며 변한 ‘야츠모’의 앞에서 이치지쿠는 너무나 지난날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야츠모’는 소년이란 말을 듣자 정말 상처받은 소년이라도 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솔직한 마음에 귀 기울인다. 이치지쿠는, 좋았겠지, 하고 생각했다. 당연한 대답이 부표처럼 떠오른다. 널 잡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 그러나 동시에 깨닫는다. 멀끔해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야츠모’를, 자신은 절대 붙잡아 곁에 둘 수가 없었을 거라고. 어떤 수를 썼더라도, 스스로 납득 가능한 형태로 그 결혼을 취소시킬 수 없었을 거라고. 이치지쿠는 수용했다. 이 수용이란 참선의 형태를 띤다. 참선, 종교를 사랑하는 인간들의 단어지. 회피하고 싶은 사실로부터 버텨야 할 때 참 도움이 되는 행동 방식이었다.
수용을 피할 수 없다면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했다. 형태는 없었지만, 결혼식 전부터 줄곧 해온 생각이다. 여전히 유효하고, 이치지쿠는 한 번 더 도망칠 뿐이었다. 야츠모의 결혼식으로부터, 재회와 섣부른 고백으로부터, ‘야츠모’의 소년 같은 행동으로부터. 이름조차 야츠모가 아닌 ‘야츠모’를 거절한다. 그에게서 벗어난다.
이치지쿠는 소복하게 눈이 쌓이기 시작하는 길을 거침없이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득뽀득 소리가 났다. 발끝이 차갑게 얼어들기 시작했고, 볼이 까슬까슬하게 일어났다. 하늘까지 한없이 흰 회색으로 변하고, 사방은 얼어붙은 듯 눈에 감싸여 조용하다. 이케부쿠로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연한, 무슨 사건이 벌어져도 거짓말 같은, 그 전부가 사실로 존재하는 비일상의 이케부쿠로로. 자신의 안락한 전동 휠체어로, 필요한 것보다 조금 싸늘하게 온도가 맞춰진 단정한 집으로.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돌아간다. 난자당한 마음을 안고 십 년 하고도 몇 년을 더 견뎠다. 거기에는 분명, 상처 위에 스스로 덧낸 것도 더없이 많았다. 마흔다섯의 이치지쿠는 더 이상 재생하기 어려운 플라나리아처럼 작아져 있는지도 모른다. 켜켜이 쌓일 만큼 상심했고, 충격받았고, ‘야츠모’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면 세상에 달리 자신의 마음을 전할 방법을 찾을 수도 없을 만큼.
마흔다섯의 이치지쿠는 다행히 그 모든 것을 숨길 줄 알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십여 년을, 이케부쿠로에서 보냈다. 돌아갈 뿐이다. 그 이케부쿠로로.
이치지쿠가 떠난 자리에 ‘야츠모’는 균형이 무너진 자세로 여전히 서 있었다. 금세 뛰쳐나가 이치지쿠를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채였지만, 눈이 쌓인 바닥에 발이 붙잡힌 듯 가만히 있었다. ‘야츠모’에게 이치지쿠는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불을 낸다면 불을 냈고, 뛰어내린다면 뛰어내렸다. 언제나 그랬다. 말을 안 했다면 차라리 안 했을까.
그래서 명백한 거절에, ‘야츠모’는 그를 쫓아 뛰어갈 수도,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이름을 버린 것처럼, 이케부쿠로를 떠난 것처럼, 떠나보내야 했다. 아주 얇게 남은 발자국 위로 흰 눈이 끊임없이 쌓였다. 그 발자국조차 환상이라고 치부하고 싶은 것처럼 눈발은 순식간에 바닥을 덮었다.
대물림
이케부쿠로 골목의 아주 오래된 서점 앞에서 어떤 청년과 마주쳤다. 청년은 곧은 자세로 가판대에 나와 있는 중고 책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고 우연히 돌아봤을 때 이치지쿠와 눈이 마주쳤고, 한눈에 알아봤다. ‘야츠모’의 핏줄이다. 이치지쿠는 어린 청년과의 첫 만남을, 그렇게 기억한다.
어린 청년은 사려깊었다. 아버지의 그늘진 눈가에서 그의 숨겨진 과거와 비밀을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섬세했다. 그리고 그에게서 자신을 찾기도 했다. 자신도 어딘가에 결핍된 곳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꿰뚫는 듯한 그 눈빛, 늘씬한 골격, 리드미컬한 걸음걸이. 이치지쿠에게 청년은 ‘야츠모’를 떠올리게 하는 방아쇠 같았다. ‘야츠모’ 당사자보다 훨씬 더, 그를 절절히 기억나게 했다.
우습군. 그의 핏줄에게서 그의 존재를 더욱 짙게 확인하다니 말이야, 유전의 법칙을 완전히 거스르는 문제일까, 아니면 닮은 것을 보고 원본을 떠올리는 인간 특유의 불필요한 사고력 문제일까? 내가 보기엔, 그놈의 상상력이 문제야. 이것을 보고 저것을 떠올리고, 소설을 보며 우리 주변의 이웃에 대해 생각하지. 그래서 책이 여태까지 팔리는 거고. 아아, 기구하군. 그와 나의 삶을 구분하려고 이십여 년 동안 무진 애를 썼는데 말이야. 이 이케부쿠로에서.
언젠가, 어린 청년은 이케부쿠로에서 이치지쿠와 함께였다. 사거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대로변에서 택시를 붙잡아 올라타고 있었다. 질 나쁜 우연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상투적인 표현 그대로, 예상치도 못한 아버지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버지의 표정은 얼이 나간 것 같기도 했고, 분노와 당혹감에 휩싸인 것 같기도 했다. 단박에 눈치챘다.
‘아버지의 결핍이다.’
청년은 택시에 먼저 올라탄 이치지쿠를 보았다.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쉰이 넘은 두 장년에게서 불꽃이 튀는 것처럼 소년의 눈빛이 보였다. 그것은 아주 순간이었고,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청년은 인사할 타이밍을 놓치고 어물어물 택시에 몸을 실었다. 꽉 갇힌 공간에서는 상업적이고 상냥한 냄새가 났다. 창문 밖으로 망연한 표정의 아버지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 뒤로 사라졌다.
“아버지를 아세요.”
“알지, 그럼.”
청년은 그 짧은 대답을 듣고, 이치지쿠에 대한 호기심이 불길처럼 피어올랐다. 아주 맹렬한 끌림. 근사하게 나이 든 옆얼굴에 방금 보았던 소년의 눈빛이 겹쳤다. 이 사람이 아버지의 ‘결핍’이다. 조금 전까지는 아무 사이도 아닐 수 있었던 어른에게서, 아주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청년은 구태여 더 묻지 않았다. 직접 알아내고, 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찬찬히, 그렇게 해 나가면 될 일이었다.
이치지쿠는 조용해진 청년을 의식했다. 제 아비와 분명히 눈이 마주쳤지, 내 표정도 보았을 거고. 그런데 저기까지만 질문하다니, 현명하군. 이치지쿠는 확신했다. 분명히 어린 청년은 지금 자신의 아버지와 나의 사이를 파악했을 거고, 지금 그러지 못했더라도 가까운 시일 내에 분명히 그렇게 될 거라고. 잠깐 만난 사이에도 알 수 있을 만큼 청년은 섬세하고 눈치가 빨랐다. 그럼, 너도 알겠지. 이치지쿠로서는 그런 마음이었다. 그 호기심을 어쩌랴, 싶기도 했고. 상처받을 거라는 말을 건네기에도 아까웠다. 아니, 그 말을 전하기엔 이미 타이밍이 너무 지나버렸지. 청년은 섬세하고 눈치가 빨랐으니까.
택시는 여전히 바깥세상과 꽉 격리된 채로 안락하게 나아간다. 이케부쿠로를 가로지른 택시는, 어느 조용한 주택가 근처에 청년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케부쿠로로 돌아오겠지. 한 사람만을 태운 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청년은 불현듯 깨닫는다.
‘불이 붙었는데, 내 마음은 종이로 된 재질이었던 거야. 타서 없어졌지, 무척 괴롭게. 이치지쿠 씨가 보는 건 내가 아니라 내가 비추는 아버지였던 거야.’
흔들리는 눈동자 안에는 재로 변해가는 하트 모양 종이가 있다. 섬세하게 접힌 흰 종이는 속절없이 타들어 간다. 똑똑한 청년은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고, 이치지쿠는 어렴풋하게 예감했다. 알게 될 일이었다.
알게 될 일이었다니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첨예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하지만 현명하고 사려깊은 사람과 노련한 사람의 만남이었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청년은 가만히 실연하고, 수용했다.
“아버지도 아시는 것 같아요. 아니, 알고 계시겠죠.”
그런 일이 있고도 청년은 여전히 이치지쿠의 곁에 있다. 지금까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청년은 종종 이치지쿠를 찾아왔고, 이치지쿠는 그를 돌려보낸 적 없었다.
“그것도 알아, 소년. 나는 다 안다니까.”
이치지쿠는 지루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린 청년은 조금씩 이케부쿠로에 물들고 있었다. 비일상의 유혹이라는 가랑비에 옷자락이 조금씩 젖어 들어, 자신이 밟고 선 상황이 얼마나 비범한지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그때, 야츠모라는 이름으로 한때 이케부쿠로를 배회했던 장년의 남성은 홀로 집에 있었다. 서재라는 이름이 붙은 거창한 방에서, 두꺼운 원목으로 된 책상 앞에 앉아 술병을 기울였다. 미지근한 호박색 술이 화려한 무늬의 유리잔에 흘러든다. ‘야츠모’는 쓰린 속에 애꿎은 술을 꿀꺽꿀꺽 삼켰다. 자문한다. 아들을 질투하고 있나? 그러다 이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버석거리는 웃음을 짓는다. 입술에는 술 방울이 번들거리며 맺혀 있다.
“그래도, 나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잖아…….”
볼품없이 우쭐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곤두박질친다. 까만 심상 속에는 바닥도 없이 수렁이다. 둘이 함께 있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전화 한 통, 메시지 한 건을 넣을 수 없는 처지다. ‘야츠모’는 잔에 찰박하게 남아있는 술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는다. 타는 듯이 쓰린 감각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간다. 짙게 인상을 쓰고 고개를 숙인다. 늘어진 테이프 같은 말투.
“네가 필요하다면……. 그래. 네가 필요한 걸 가져가라…….”
온통 책과 나무로 가득 차 있는 컴컴한 서재에서, 어울리지 않는 ‘야츠모’는 회한이 가득 묻은 목소리를 토한다.
“네가, 나한테 직접 받아 가지는, 못하는 것 같으니까…….”
‘야츠모’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이케부쿠로에 있는 이치지쿠도 마찬가지였다. 이치지쿠의 곁에는 ‘야츠모’의 장성한 아들이 있다. 그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분을 나누었던 곳에, 매트리스만 바뀐 침대가 있다. 여전히 조금 추운 집에, 여전히 베이지를 주로 한 인테리어에, 여전히 거실에 있는 침대 위에, 그 대신 그의 아들이 앉아 있다. 비슷한 냄새를 풍기고, 비슷하게 말하고, 비슷하게 생각하고, 그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랑할 줄 아는, 감히 말하건대, 아마도 사랑했던 이의 아들이.
이케부쿠로 서쪽 출구 공원. 매해 비슷한 일루미네이션, 전구를 뒤집어쓴 커다란 삼각형 트리, 글로벌 링에서 물풀처럼 흘러내리는 원색의 빛망울.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을 주머니에 가득 넣고 길거리를 오간다.
이케부쿠로가 익숙한 남자는 매년 찾아오는 겨울에 매번 느끼는 지난한 감상을 곱씹고 있었다. 반복되는 지루한 주제는 독자를 피곤케 할 뿐이다. 차가운 기둥에 기댄 어깨를 떼며, 무게를 실은 발을 바꾼다. 까만 코트 속에 숨은 그는 존재감이 사라진 까마귀처럼 보인다. 청부업자를 했던 사람의 눈썰미가 아니면 찾아내기 힘들 정도로. 까마귀 같은 남자는 눈앞에 선 사람을 올려다봤다.
“메리 크리스마스.”
찬바람이 묻은 목소리는 기억보다 조금 더 낮고, 세월이 느껴지는 질감을 갖고 있었다.
야츠모는 입 밖에 겨우 낸 간결한 말로부터, 거대한 해방감을 느낀다. 그건 야츠모를 순식간에 외로움의 절벽으로 밀어내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아주 오래된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가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거기에는 너무 많은 게 담겨있어서, 야츠모 자신도 알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눈덩이가 입 밖으로 쏟아진 것 같았다. 이치지쿠는 원하지 않았을, 겨우겨우 숨겨낸 ‘사랑해’부터―몇십 년을 족쇄처럼 끌고 온 자신의 다 헤진 마음까지. 온갖 흙과 도시의 더러움이 묻어 회색이 된, 얼었다 녹기를 반복해 아주 단단하게 변한, 얼음 같은 결을 가진 눈덩이.
키가 큰 남자는 눈앞의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걸음을 옮긴다. 눈이 녹은 질척한 바닥에서, 구둣발이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사박사박 소리가 났다. 까만 코트 안에 몸을 숨긴 남자는 여전히 글로벌 링의 기둥 근처에 그림자처럼 몸을 기대고 있다.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얼마나 나누었는지는, 거기에 있는 이케부쿠로의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누군가 관심을 두기에 그들은 너무 겸허한 어른이었고, 화제가 되기엔 비일상의 테두리로 밀려난 나이 든 사람이었기 때문에.
쿠로이키 가의 청년은 거리마다 장식이 화려한 어느 겨울, 자신을 실연시킨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케부쿠로 서쪽 광장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