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바다 01
レトル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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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3 14:53
크리피 웨딩 샤워 타로 기반

*633님 글 커미션 R18 구간이 나옵니다! 그렇게 노골적이진 않음 *03 쯤에 청년X중년이 어째선지 등장(수위x) 까만 바다 글 633 차례 통과 의례 … 2 하얀 거짓말 … 10 통계와 오류 … 17 언 것 … 24 보석 같은 추억 … 38 소년 … 39 대물림 … 43 통과 의례 고급 요정의 무거운 문이 열리고, 근사한 쓰리 피스 백양복을 차려입은 장년의 신사가 짧은 계단을 내려온다. 그의 곁에는 단아하고 멋스러운 장년의 여자. 둘은 가볍게 팔짱을 끼고 있다. 누가 보기에도 단란하고 고아한 부부로 보인다. 두 사람이 요정을 완전히 빠져나오자, 그 뒤로 젊은 두 사람이 더 나온다. 큰 키, 깔끔하게 넘기려 애쓴 듯한 까만 머리칼, 귓불에는 피어싱을 한, 불온해 보이는 남자. 곁에는 성인식 때처럼 화려한 후리소데를 입은, 빈틈없어 보이는 여자. 어깨에 두른 퍼 숄이 볼 선을 감싸 먼저 나온 남자보다 앳되어 보인다. 두 사람은 요정의 대문을 나서 장년의 부부를 배웅한다. 까만 세단 뒷자리에 나란히 올라탄 부부는 각자 근엄하고, 인자한 얼굴로 안녕을 고한다. 야츠모는 바짝 힘이 든 목소리로 인사를 올렸다. “예, 안녕히 가십시오, 어르신!” “먼저 들어가세요. 아버지, 어머니.” 가장 상석에 앉은 장년의 신사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인다. 그리고 운전 기사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이면, 곧 차는 미끄러지듯이 출발한다. 그 뒤로 기다렸다는 듯이 비슷한 세단이 두 사람 앞에 선다. “운전은 쿠로이키 씨가 할 거예요.” “예, 타고 가시면 됩니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이 말했다. 야츠모는 그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조수석 문을 연다. 두꺼운 퍼 숄을 두른 여자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차에 올라탄다. 야츠모는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가 차에 오른다. 그 차는 아마도 여자의 차였다. 멀끔하게 차림 했다지만, 거의 마구잡이로 머리를 넘긴 사내와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훨씬 더 무겁고, 진중한 스타일이 탈 만한 차. 새까맣고, 안락하고, 커다란 세단. 여자와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었다. 차 문을 열어주는 것은 여자가 부탁한 행동이었다. 앞으로는 내가 당신과 함께 차에 탈 때, 문을 열어줘요. 아버지는 늘 그러셨거든요. 여자는 야츠모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이후로 야츠모는 여자와 함께 차를 탈 일이 생기면 늘, 차 문을 열어주는 ‘평범하게 매너가 좋은 남자’가 될 수 있었다. 야츠모는 차에 올라타 안주머니에서 장갑과 안경집을 꺼냈다. 선글라스를 쓰고, 까만색 가죽 장갑을 손에 낀다. 그리고 운전대에 손을 올린다. 상견례 자리에서는 선글라스와 장갑을 빼야 한다고 일러준 것도 여자였다. 여자에게는 새삼스러운 이야기였으나, 야츠모로서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결례인 줄도 모르고 진입장벽을 낮춘다느니, 더 멋지게 어필한다는 이유 등으로 고스란히 착용한 채 상견례 자리에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이케부쿠로에서도 통하지 않는 생각이 정상성의 세계에서 통할 리 만무하다. “자. 그럼, 출발할게요.” “그러세요.” 야츠모는 여자가 안전띠를 매는 것을 확인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앞서 떠난 차보다 투박한 운전 솜씨였다. 목적지는 벌써 몇 번이나 가 본 킷사. 안에는 항상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끼어 있고 천장과 벽, 바닥은 모두 길이 잘 든 나무로 되어있다. 여자는 언제나 카운터를 피해 가장 안쪽에 앉았다. 이 킷사에 몇 번밖에 와보지 않았을 때에는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은 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금세 알았다. 여자가 자신과 함께,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면 으레 이곳으로 오곤 한다고. 여자와 함께 이 킷사에 올 때면 가게엔 늘 둘 뿐이었으니까. 한적한 골목에 차를 세우고, 야츠모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여자가 조용한 발걸음으로 내리고, 앞장서서 킷사로 들어간다. 야츠모는 그 뒤를 쫓는다. 멀리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여유 없이 잰걸음을 걷게 됐다. 야츠모는 이 결혼을 통해 자유로워질 셈이었다. 여자는 결혼의 대가, 혹은 선물로 야츠모에게 자유와 새 삶을 약속했다. 이케부쿠로 밖에서의 새로운 삶. 아무래도 신부의 아버지는 대단한 야쿠자의 조장 정도는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신부도 야츠모에게 그런 거창한 걸 약속할 수 있었겠지. 야츠모는 신부의 아버지가 굉장한 덩치의 어깨에게 ‘오카시라’라고 불리는 것을 우연히 본 적 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신부의 아버지는 머쓱한 척도 하지 않았다. 숨겨야 할 일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신부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조용하고 품위있는 사람. 나름대로 다정하고, 야츠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부담스럽게는 하지 않았다. 야츠모는 신부의 그런 면이 기꺼웠다. 자신의 과거를 생각한다면, 이런 인연이 닿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나 가까운 일이었다. 신부는 오늘도 카운터에서 가장 먼 자리에 작은 창문을 등지고 앉았다. 야츠모는 장난감처럼 작은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 마주 앉는다. 흰머리와 눈썹이 딱 보기에도 나이가 지긋한 마스터는 금세 따뜻한 커피 두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약속이라도 되어있는 것처럼. “어땠어요?” 야츠모의 귀에 나긋한 목소리가 달라붙는다. 야츠모는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떴다. “음, 뭐가?” “상견례요. 특히 우리 아버지.” “그러게……. 뭐, 좋은 분 같아 보였어요. 인상에 힘이 있으시고.” “무섭다는 말을 예쁘게 하네요.” “하하하. 무섭다고는 안 했는데.” “그래도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신부의 말씨는 언제나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단단한 심지가 있었다. 몇 번인가 꿰뚫리는 듯한 이야기에 진땀을 흘린 적도 있다. 야츠모는 어릴 적 벌거벗겨진 채로 쫓겨났던 것과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신부에게 거짓말은 하지 말자고, 못 박듯 생각한다. 킷사에서 나눈 대화는 길지 않았다. 야츠모로서는 새삼스러웠다. 늘, 이렇게 사소한 대화를 하기 위해 시간을 내어 킷사에 오는군. 커피는 채 식지 않아 여전히 따뜻한 김이 오르고 있다. ‘야쿠자의 가족에게 사생활이란 이런 건가. 함께 차를 타는 사람부터 골라서, 완벽하게 믿을만한 공간에서야 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게 아무리 하찮은 이야기라도 말이야.’ 그 뒤로 이어지는 사소한 이야기. 피곤하지는 않나요. 괜찮아요. 당신은. 저는 좀 피로해요. 바로 집으로? 그러게요, 쿠로이키 씨는요. 흠, 나는 들를 데가 있어서. 이케부쿠로에 가는 거죠. 오우, 맞아요. 어디에서 해도 달라질 리 없는 평범한 대화를 이렇게 독립된 공간에서 내밀하게 나누는 게, 도리어 야츠모에게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이 기분의 정체를 골몰한다. 도망가고 싶다는 감상에 사로잡힌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침묵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신부는 미련 없이 일어났고 야츠모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갓길에 대 놓은 차에 신부를 태우고, 야츠모는 다시 운전석에 오른다. 신부가 조수석에 오르는 것은 야츠모의 차를 탈 때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언제나 자신에게 맞는 상석에 앉았다. “집에 데려다 줄게요?” “네, 이제 더 갈 데는 없어요.” 야츠모가 모는 자동차가 붕 소리를 내며 골목을 빠져나간다. 쿠로이키 씨는 운전을 거칠게 하네요. 신부가 딱 한 번, 그렇게 말한 적 있었다. 그 이후로는 야츠모가 어떻게 운전을 해도 가만히 조수석에 오를 뿐이다. 신부의 이 방식은 야츠모에게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야츠모는 그 후로 신부를 태울 때마다 ‘조심해서’ 운전했다. 신부가 타지 않는다면 고려도 하지 않을 선택지였다. 차에서는 두 사람 모두 그다지 말이 없었다. 둘을 실은 차는 도시 구석의 킷사에서 자동차로 달려 이십여 분, 이케부쿠로에서 떨어진 고급 주택가에 도착했다. 야츠모는 성실하게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연다. “고마워요.” 저택 치고는 일견 소박해 보이는 집 앞에 차가 멈춘다. 차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서면 그제야 커다랗고 두꺼운 대문, 높은 담장 너머 소나무 끄트머리가 보인다. 그리고 작은 물줄기 소리. 모든 것이 사실 그 집은 보기처럼 소박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대문이 무겁게 열리면 그 안쪽에는 그림처럼 정리된 정원이 있다. 야츠모는 그 안으로 신부를 들여보낸 뒤 혼자 남게 된다. 신부는 대문을 넘으려다 야츠모를 뒤돌아보고 말했다. “청첩장, 주변 사람들에게 돌려요. 결혼식에 부르고 싶은 사람 정돈 있겠죠.” 야츠모는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신부는 미련 없이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신부는 가끔, 야츠모를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곤 했다. 평범한 삶이라곤 전혀 몰라서, 하나하나 가르쳐야 하는 것처럼. 야츠모는 그게 싫지는 않았지만―어떻게 보면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때때로,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졌다. 커다란 세단은 정장 입은 사람이 나와 어딘가로 운전해 가져갔다. 야츠모는 거리의 택시를 잡아타고 비상식이 즐비한 이케부쿠로로 향했다. 상냥하지는 않지만 더없이 익숙한 도시. 한 사람을 떠올리며 빠르게 스치는 회색 도시의 가로수 떼를 본다. 오오우나바라 이치지쿠. 결혼식에 와주길 바라는 것보다는, 그에게는 꼭 청첩장을 건네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 야츠모는 그날, 신부의 집에 들어가 지내게 된 이후로는 드물게 이케부쿠로에서 잠들었다. 한가로운 평일 오전. 카페의 인테리어는 온통 밝은 베이지와 미색으로 꽉 차 나긋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야츠모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카페에서, 어울리지 않는 하얀 봉투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앞에 앉아있는 오오우나바라 이치지쿠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야츠모는 봉투를 받을 생각이 없는 이치지쿠를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이트밸런스가 무너져 너무 밝게 찍힌 사진처럼, 하얗게 날아간 늦은 오전의 이케부쿠로. 창에 비친 이치지쿠의 인영과 야츠모의 눈이 마주친다. 이치지쿠는 버튼이 눌린 것처럼 이죽거리는 얼굴을 켠다. “이야. 떠나겠다고 해서 곱게 보내줬고, 사라졌대서 찾지 않고 놔뒀더니. 대뜸 돌아와 이게 대체 뭘까, 야츠모 군? 응?” 이치지쿠는 가는 다리를 길게 꼬았다. “뭐긴 뭐야. 결혼을 하게 됐어.” 야츠모는 평범하게 대답했다.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했다. 여전히 손에는 흰 봉투가 들려 있다. 이치지쿠는 작금의 상황이 아주 불만족스러웠다. ‘결혼이라. 평범한 인생의 시작이자 끝이로군! 과연 야츠모 군의 선택은 시작에 가까울까, 끝에 가까울까? 모쪼록 끝이 아니어야 할 텐데 말이야. ‘평범한’ 사람들은 결혼으로 그 인생의 평범함과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하지. 자신이 알맞은 스텝을 밟고 있음을 위시하며 말이야. 하지만 말이야, 아주 불쾌하네. 실로 불쾌하기 짝이 없어.’ 이치지쿠는 속으로 벌써 에이포 용지 세 장 분의 불만을 순식간에 써 내려갔다. 인간을 사랑하려 부단히 탐구하면 무엇할까. 인간은 때때로 이다지도 무지하고 간악해서, 어떠한 의도도 없이―단세포 바보라면 그렇겠지, 분명히!― 사람을 인류애 절멸의 길로 이끌고 마는데. 이치지쿠는 야츠모가 여전히 내밀고 있는 흰 봉투를 가만히 받아 들었다. 속으로 거침없이 쓴 에이포 용지 다섯 장 분의 불만을 박박 찢는다. “그렇군.” “그래……. 아니, 그게 다야? 선생답지 않은…….” “혼자 평범하게 살아갈 생각을 하다니. 괘씸하네, 소년.” 이치지쿠의 얼굴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빈정거렸기 때문인지 웃음기가 흔적처럼 남아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웃기거나 유쾌한 얼굴은 아니었다. 야츠모는 어딘가 굳은 이치지쿠의 얼굴을 보며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한 마디 더 붙일까 싶었을 때, 이치지쿠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그래, 잘살아 보던가.” 낚아채듯 청첩장 봉투를 가져온 이치지쿠는 조금의 미련도 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앉아있던 가죽 소파에는 뾰족하게 패여 자국이 남았다. 소파의 패드가 다시 천천히 부푸는 동안, 이치지쿠는 완전히 자취를 감쳤다. 야츠모는 혼자서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 두 잔 앞에 덩그러니 놓인 사람이 되었다. 이치지쿠가 앉아있던 자리는 금세 차올라 원래 사람이라곤 없었던 것처럼 변했다. 그 후, 오오우나바라 이치지쿠는 이케부쿠로에서 완전히 실종되었다. 하얀 거짓말 이케부쿠로에도 겨울은 온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이케부쿠로는 지금, 그야말로 ‘겨울’이다. 다른 여느 도시들처럼. 며칠에 한 번씩 눈이 내린다. 얼어서 빙판이 되거나 녹아서 회색 구정물이 된다. 목도리에는 찢어진 눈송이가 들러붙고 일루미네이션은 비대칭적으로 깜빡인다. 그런 겨울, 이케부쿠로에도 겨울이 왔다. 야츠모는 돌연 사라진 이치지쿠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결혼이라는 것의 준비를 위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때때로 눈이 내리고 어색한 외지의 신이 축복을 내리는, 온 세상 사람들이 싱숭생숭해지는 이 시즌. 야츠모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며칠이 멀다 하고 신부의 키링처럼 매달려 다니며 결혼식을 위한 계약을 했다. 도장을 찍거나, 사인을 하거나. 그리고 시간이 남을 때면 이케부쿠로에서 미친 사람처럼 이치지쿠를 수소문했다. 야츠모는 안 가 본 곳이 없었다. 이치지쿠가 책을 내는 출판사, 늘 똑같은 메뉴를 파는 스시 가게, 종종 아는 얼굴을 마주치는 중고 서적 판매점. 그뿐인가, 수상한 그림자가 가득한 육교 아래, 이치지쿠와 지나치며 악연의 꽃말을 배웠던 불법 도박장 옆 골목에도 몇 번이고 들렀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이치지쿠는 찾을 수 없었다. 이치지쿠가 어디로 떠났다든지, 마지막으로 어디에 얼굴을 비쳤다든지 하는, 그런 얘기는 티끌의 티끌조차 들을 수 없었다. 청첩장을 주고 겨우내 이치지쿠를 수소문해 야츠모가 얻을 수 있었던 정보는 단 한 가지였다. 맨 처음 이치지쿠와 일하는 출판사 건물에 갔을 때였는데, 몇 번 마주쳐 면식이 있는 편집자 마루베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뭔갈 찾으러 가신대요. 못 찾으면 안 돌아오실 것처럼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그 ‘무엇’이 정녕 무엇인지는 마루베도 모른다고 했다. 야츠모는 그날 화에 못 이겨 편집부의 유리문을 부술 듯이 때렸다. 마루베는 문에 금이라도 갔을까 봐 조마조마 마음을 졸였다. 그래서, 야츠모는 이치지쿠가 이케부쿠로에 돌아올 때까지, 이케부쿠로를 이 잡듯 뒤지기로 했다. 들른 곳을 또 들르고, 본 곳을 또 봤다. 시간이 된다면 낮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이케부쿠로 골목 사이를 누볐다. 야츠모가 그렇게 이케부쿠로를 전전하다 지칠 때쯤이면, 이케부쿠로 밖으로 불려 나가 차에 타야 했다. 신부는 새벽에 어딜 그렇게 다녔어요? 하고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결혼식 전에는 해야 할 것이 정말 많았다. 야츠모는 처음 알았다.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예약하고, 계약서를 쓰고, 돈을 지불해야 하는지. 이래서야 사람 죽이고 살리는 게 더 싸고 쉬울 판이었다. 결혼식은 이 겨울이 끝나기 전에 올리게 되어있다. 그리고 홀에서 신부의 손을 맞잡기 전까지, 마쳐둬야 할 일은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오늘은 그 바쁜 날 중에서도 손에 꼽게 중요한 날이다. 신부의 드레스를 고르는 날. 웨딩 숍은 삼 층짜리 건물로 되어 있었다. 건물 외벽부터 반짝이는 장식이 붙어있는, 전형적으로 화려한 웨딩 숍. 커다란 쇼윈도에는 무거워 보일 정도로 반짝이는 것들이 달린 드레스가 그 위용을 뽐내며 화려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야츠모는 자신과는 연이 없는 광경에 위축되었다. 일 층은 전부 억 소리가 나는 드레스와 구두. 이 층으로 올라가야 드레스를 입어볼 수 있었다. 야츠모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직원과 신부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물론 건물 내부는 모두 검붉은색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계단을 빙 두르고 오르는 가운데에는 야츠모의 키만 한 샹들리에가 복층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야츠모를 뺀 모두가 이 공간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야츠모는 모든 것이 너무나 생경해서, 도무지 자기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신부는 여기에 세 번째인가, 네 번째로 왔다. “쿠로이키 씨. 오늘 보는 게 마지막이에요.” 야츠모가 새벽을 틈타 이치지쿠의 집이며 옥상을 뒤지러 다녀오는 동안, 신부는 무슨 숍에 들려 머리며, 화장을 새로 받고 온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전문가’의 힘을 빌렸다는 뜻이다. 아름답군. 야츠모는 솔직하게 생각했다. 보편적인 감상이었다. 신부는 늘 아름다웠고, 오늘, 훨씬 더 아름다웠다. 야츠모는 선글라스를 벗어 자켓 안주머니에 넣었다. 푹 패인 눈썹 아래를 손가락으로 세게 눌러 미간을 당기고,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커튼이 열리고, 어딘가에 매달린 것처럼 키가 커진 신부가 나타났다. 장막같이 길고 치맛자락이 두꺼운 드레스. 다 비슷하게 보일 테지만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야츠모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신부는 이 결혼식에 크게 공을 들이고 있다. 야츠모는 나서서 도울 수야 없었으니 방해라도 되지 않고자 했다. 황새처럼 나아가는 신부를 열심히 쫓는다. “예쁘네. 음, 늘씬해 보여요.” 신부가 고개를 끄덕이고, 커튼이 촥 소리를 내며 드리워졌다. 직원들은 일사불란하다. 이치지쿠는 대체 어디에 간 걸까. 커튼이 좀 전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다시 걷힌다. 이번에는 튤을 사치스럽게 쓴 귀여운 드레스. 야츠모에게는 솜사탕처럼 보였다. “잘 어울리지만, 좀 장난감 같네요.” 커튼을 붙들고 있거나 신부의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던 직원들이 수군거렸다. 신부는 가늘게 눈을 뜨고 야츠모를 바라보더니, 풋 소리를 내며 웃는다. “결혼식에 장난감은 안 되죠. 다음 거 입어볼게요.” 이치지쿠는 언제 돌아올까. 야츠모는 신부가 보여주는 모든 드레스에 성실하게 코멘트하려 했다. 이 가게를 나서면 거의 다 잊겠지만. “…….” “쿠로이키 씨.” “아아, 응. 그러니까……. 미안해요, 그건 어깨가 드러나는 거네.” 야츠모의 가물가물한 기억에 어깨가 이렇게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는 처음이었다. 가슴선을 따라 화려하게 드레이핑이 가미된, 밑으로 흐르는 라인이 아름다운 드레스. “별론가요?” “아니. 당신은 어깨가 아름다우니까. 예쁘네, 잘 어울려요.” “그래요. 다음이 마지막이에요.” 커튼이 또다시 드리워진다. 봐야 할 것이 사라진 동안 야츠모는 성실할 정도로 이케부쿠로의 비일상에 정신을 떠나보낸다. 그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커튼이 다시 젖혀지는 소리가 나면, 촥, 다시 이곳으로 소환되듯이 빨려 들어왔다. “어때요.” 종 모양도, 인어 꼬리 모양도 아니고, 진주가 달려 있지도, 리본이나 투명한 튤이 달려 있지도 않은 드레스. 야츠모는 처음으로 드레스가 눈에 완전히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납작한 게 꼭 오오우나바라가 입는 가운 같네.’ 그리고 습관처럼 떠오르는 이치지쿠. 아니지. 야츠모는 눈을 내리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예뻐요. 그건 시로무쿠 같아서 좋네요.”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커튼은 마지막 드레스를 보인 후 영영 닫혔다. 야츠모는 화려한 웨딩 숍 이 층의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 신부를 기다린다. 드디어 주어진 유예를 틈타 긴장했던 숨을 몰아쉬었다. 야츠모는 또 금세 이치지쿠의 생각에 빠진다. 이케부쿠로와 거기서 사라진 이치지쿠를 습관처럼 떠올렸다. 어디에 갔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이케부쿠로. 일상처럼 맞닿아있던 비일상과 비정형의 삶으로부터 자신이 착실하게 유리되어 간다. 원했던 일인 것 같으면서도, 좀체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모든 절차가 어떤 걸림돌도 없이 찬찬히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거기에 몸을 싣고 무책임하게 편승하면서, 위화감을 느낀다. 무엇이 옳은지, 어느쪽이 진짜인지, 그런 것들을 결정할 수 없다. 아니, 생각하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이를테면 난폭하게 물갈이를 하는 어항에 든 물고기와 같았다. 야츠모는 쏟아지는 물벼락에 겨우 정신을 차리는 데에 급급했다. 머리를 때리는, 처음 겪는 정상성의 세계. 그러면서도 물이 조금 잔잔해지는 것 같으면 떠나온 바다를 그린다. 옆에 있었던 것 같은 다른 물고기를 끊임없이,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야츠모는 창밖을 보다가, 갑자기 들어선 새까만 터널에 최면에서 깨듯 정신을 차렸다. 주황색 등이 눈앞에 잔상을 그리며 지나간다. 이미 검은 세단은 야츠모를 싣고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다. 곁에는 신부가 있다. 신부는 작게 헛기침하고 야츠모에게 말을 붙여왔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 하나만 이야기해 봐요. 당신이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까, 걱정 말고요.” 야츠모는 불편한 의자에 앉아 보았던 몇 가지 드레스들을 떠올린다. 전부 하얗고, 광택이 있었고, 서커스장 천막처럼 길었다. 개중에 기억에 남는 것. “난, 시로무쿠 같다고 얘기했던 거요.” “네 번째, 맞죠?” “아아, 뭐. 그랬던 것 같아요.” 야츠모는 자신의 무성의함에 깜짝 놀라 뒤늦게 신부를 돌아보았다. 신부의 얼굴은 언제나와 같이 평온하다. 야츠모는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깨문다. 그게 의사 가운처럼 보였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 이치지쿠를 알지도 못할 신부에게, 야츠모는 이치지쿠의 존재를 숨긴다. 자동차는 이제 터널을 빠져나와, 한가로운 언덕배기의 동네로 향한다. 말 없는 기사의 운전은 수준급이었다. 요람처럼 운전해서, 거의 잠들 것 같았다. 세단의 조용한 배기음과 안락한 승차감까지 졸음을 거들었다. 야츠모가 저택에 도착한 것은 까무룩 고개를 떨구기 직전이었다. 차가 멈추자 야츠모는 반사적으로 내려 신부가 내릴 수 있도록 상석의 문을 연다. 손을 내민다. “고마워요.” 야츠모는 명백하게 젠틀맨처럼 굴고 있다. 어디선가 주워 본 것들을 살뜰히 사용하는 중이다. 개중에는 신부가 요구해 몸에 익힌 것도 몇 가지 있다. 언젠가 신부가 야츠모에게 말했다. 평범하게 좋은 남자가 될 수 있어요. 평범하다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울림이 왜 이렇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는지. 야츠모에게는 신부의 말이 마치 자신이 절대 가질 수 없거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오히려 야츠모에게는 탐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오전,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처럼 깔끔하게 꾸미고 나타났던 신부는 그 모습 그대로 집으로 돌아간다. 립스틱 조금조차 지워지지 않은 채. 나긋한 얼굴로 야츠모에게 짧은 안녕을 고한다. “일찍 들어와요. 저녁 같이 먹게요.” 야츠모는 결혼을 약속하고 나서부터, 이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무려 상견례도 하기 전부터였다. 손쉽게 가족의 일원이 되어 간다. 야츠모 자신의 자각이 충분한지는 별개로. 저녁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오면, 식사를 하겠지. 근엄한 아버님, 나긋하고 상냥한 어머님. 옆자리에는 아직도 돌아서면 얼굴이 가물가물한, 신부가 될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은 야츠모를 빼놓고 흘러간다. 제멋대로 진행되고, 쫓아갈 수도 없이 나아간다. 야츠모는 습관처럼 신부의 차에 다시 올라탔다. 말 없는 운전기사는 야츠모를 이케부쿠로까지, 또 요람처럼 운전하여 데려다 줄 것이다. “오늘도 거기로 모셔다 드릴까요.” “에에. 부탁해요.” 이렇게 평범하게 신세를 지게 된 것도, 벌써 습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