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와 오류
오오우나바라 이치지쿠는 홀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찾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게 무엇이든, 찾고 나면 느껴지리라. ‘알’ 수 있으리라, 강하게 생각했다. 거추장스러운 스마트폰은 챙기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발목잡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치지쿠는 대신 이럴 때 가장 편리한 사람에게 전언해 두었다.
“마루베 씨. 나 뭘 좀 찾으러 가. 그러니까 날 찾을 생각일랑 하지 말고. 찾으면 돌아올 거야, 찾으면. 그 말의 반대는 뭔지 알겠지? 너무 머리를 굳히지 말고, 말랑말랑하게 생각해 봐. 그럼.”
이치지쿠로서는 해줄 말을 다 해준 거였다. 그럼 떠나도 괜찮지. 안일하게 생각했다. 때로는 나이브하게 삶을 대하는 태도가 필요한 법이다. 그렇게 떠나왔다. 눈이 만연한 곳, 홋카이도의 오타루.
이치지쿠의 선견지명은 눈으로 가득한 도시에 전동 휠체어가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치지쿠는 온전히 두 발로 오타루에 도착했다. 첫 번째 감상은 아주 간결했다. 흰 양복, 흰 설경. 눈사람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까만 자켓을 입었으니 까마귀라도 뒤집어쓴 건가?
이치지쿠는 어디로 향할지 고민하다가 가장 보편적인 여행의 루트를 따라보기로 했다. 낭만과 동심, 인파가 한데 모이는 곳. 인간들이 찾는 것 중에 내가 찾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인간들이 찾는 것도 많을 것이다. 고로 거기에 자신이 찾는 것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 심산이었다.
이치지쿠는 커다란 수조와 인파 사이에 갇혀 숨을 몰아쉬었다. 두 다리로 직접 걸어 다닌다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니다. 허리춤에 주먹 쥔 손을 올리고 자신의 무게를 지탱해 본다. 이치지쿠는 그렇게 한참이나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호흡을 갈무리했다. 진정되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인공적인 풍경을 눈에 담는다.
일 층의 대수조에는 다채롭고 커다란 바다 생물들이 유영하고 있다. 이치지쿠는 몇 걸음 옮겨 이름을 확인했다. 짧은꼬리가오리, 푸른바다거북. 그 외에도 생김새를 닮은 직설적인 이름을 가진 동물들. 유선형의 생물들이 인간이 만들어놓은 모형의 바다를 유유히 오간다. 그래, 여기에 너희를 보러 온 인간들은 제법 행복해 보이는 듯해. 너희는 행복하니. 이치지쿠는 속으로 물었다.
그 생각 그대로 아쿠아리움에는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의 떼로 한가득했다. 이들은 무엇을 찾아서 여기에 왔을까, 이치지쿠는 궁금해 마지않았다. 지독한 권태의 한가운데에 짝다리를 짚고 서서 물처럼 흐르는 인간 군상을 감상한다.
눈을 빛내는 아이가 있군. 음, 확실히 금방이라도 꿈을 찾아 모험을 떠날 듯해. 소년, 달려 나가라. 그에 비해 저치의 눈은 차라리 동태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군. 회색에, 탁하고, 즐거움이라곤 없는 얼굴이야. 곁에 있는 사람이 불쌍해질 정도로. 저런 이들은 물에 넣는 편이 좋지 않은가? 녹으면 생태라도 될걸.
이치지쿠는 머릿속에서 달음질치는 생각을 붙잡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오늘이야말로 생각의 자유, 탐구, 고찰, 그리고 초신성. 그건 너무 거창한가? 그렇다면 마지막은 취소하고.
딴지를 걸어야 할 사람도, 상식적으로 거슬려오는 사람도 없으니, 이치지쿠의 생각은 달리는 말처럼 오타루를 뛰어다녔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인간이 쉴 새 없이 필름을 바꿔 끼우는 환등기의 상처럼 바뀌었다. 여기서라면, 정말 찾을 수 있을지 몰라. 이치지쿠는 내심 기대하는 마음까지 달음질하는 생각에 쑤셔 넣었다.
느릿한 걸음은 수족관 복도를 흐르는 인파보다 조금 느렸다. 이치지쿠는 네발가락도롱뇽, 곤들매기, 일본가재, 쥐돌고래를 지나 네모난 수조가 기숙사처럼 늘어선 곳에 다다랐다. 그쯤에 갔을 때는 생각보다 단조로운 인간들의 인상에 시시각각 질려가고 있었다.
일견 다채로워 보였던 사람들의 무리는 전부 비슷비슷한 빛깔을 띠었다. 즐거운 사람, 즐겁지 않은 사람. 귀엽다고 하는 사람, 귀엽다고 하지 않는 사람. 갑자기 무언갈 보고 맛있겠다고 하는 몰상식한 사람. 가까이서 본 개인은 멀리서 보았을 때 통계의 점이 된다. 이치지쿠는 혀로 입술을 한 번 쓸고, 수조에 코를 박고 서있는 어린이의 말을 따라 했다.
“귀여워―.”
어린이는 펭귄을 보고 있었다. 뒤뚱거리는 날지 못하는 새. 귀여운가?
이치지쿠는 딱 한 번만 더 시도해 보고자 했다. 하늘색 색소를 넣어 물고기와 비슷한 색을 띠는 아이스크림을 400엔이나 주고 샀다. 눈앞에 들이밀고 어색한 그 말을 한 번 더 입 밖으로 낸다.
“귀여워―.”
두 번을 말해도 무엇 하나 귀엽게 느껴지거나 달가워지지 않았다. 달고 사각거리는 아이스크림은 혀끝에 불쾌한 단맛을 남겼다. 이치지쿠는 스낵 바에 있는 커다란 쓰레기통에 한 입 먹은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버렸다.
하나도 귀엽지 않아.
이치지쿠는 결론 냈다. 찾고 있는 무언가가, ‘귀여워’는 절대 아니었다고.
아쿠아리움에서 거하게 허탕 치고, 어느 날은 오타루의 운하 근처에 갔다. 숙소에서 제법 걸어 나와서 양쪽 종아리 아래가 뻐근했다. 치워져 있다 한들 눈이 쌓이고 녹아 언 빙판길을 걷는 것은 다리에 금세 부하를 주었다. 이치지쿠는 운하의 먼발치에서 걸음을 그쳤다. 운하 아래에는 거의 허리 높이까지 눈이 함빡 쌓여있었다. 힘없는 다리로 그 밑을 내려가는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치지쿠에게는 위에서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노란 가로등, 짙은 쪽빛으로 물드는 해 질 녘 운하 줄기와 하늘, 멀리 보이는 설산, 야트막한 건물들. 강줄기에 비친 가로등 빛은 잘 타는 촛불처럼 빛이 길게 늘어졌다. 물 위에서 하늘하늘 흔들리는 촛불 줄기의 향연. 펭귄처럼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작은 인영들.
“예쁘다―.”
이치지쿠는 또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을 따라 했다. 개운해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금세 마음이 팍팍해졌다. 아니, 이건 시리도록 차가운 설경과 언 강 때문이다. 이치지쿠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미의식을 의심한다.
좀 더 진짜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도록 해. 미라는 개념이 이러다 인류사에서 사라지면 어쩌려고?
사람들이 한사코 걸어 다닌 운하 옆의 도보는 회색 발자국으로 가득하다. 쓰레기통 옆에는 눈에 반쯤 모서리를 감춘 깡통 쓰레기와 구겨지고 녹은 전단지가 굴러다닌다. 하얗게 쌓인 눈더미에조차 인간들이 뛰어들어 패인 자국들로 가득하다.
인파에 묻힌 운하의 전경은 이치지쿠에게 어떤 것도 주지 못했다. 이치지쿠는 쯧, 소리가 나게 혀를 차고 걸음을 옮겼다.
관광 도시에 갈 곳이야 많았다. 이치지쿠는 다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타베로그 4.8점에 빛나는 샌드위치 가게에서는 두툼한 카츠산도를 먹었다. 저렴한 가격과 소박한 맛으로 인기라는 골목배기의 빵 가게에서는 크로켓을 종류별로 샀다. 오르골로 꽉 차 있던 기념품 가게에서는 귀가 얼얼해질 때까지 오르골을 구경했다. 이치지쿠는 그 어디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생리적으로 괴로워지기만 했다. 봐도 즐겁지 않은 것들, 귀를 가득 채우는 소음, 눈을 아프게 하는 빛 공해. 그럼에도 이치지쿠는 오기를 부렸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자신도 모르는 목표의 실마리를 찾아서, 여기로, 저기로, 다른 곳으로.
오타루의 곳곳에는 귀여워, 맛있어, 예뻐 등의 소박한 환호가 가득했다. 한겨울의 추위에 발갛게 물든 뺨에는 행복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듯했다. 일차원적인 만족과 추억이라는 이름의 동판화를 더 이상 필요 없을 만큼 보았다는 게 이치지쿠의 감상이었다. 그것까지만 보았어도 충분히 지난한 여행이었을 테지만.
행복의 뒤편에 언제나 산재해 있는 불행은 이치지쿠의 뒷맛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인간 사회의 덧없음을 확인 사살하는 느낌까지 들어 이치지쿠는 더없이 불쾌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을 찬찬히 뜯어보며 탐구라는 이름으로 음미하는 자신이라니.
이래서야 인간 사회에 부적응한 나만 재차 확인하는 꼴이군. 정말이지 불유쾌한 경험이야. 완전히 잘못된 시도였어.
며칠 밤낮 동안 줄곧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이치지쿠는 눈에 못이라도 박힌 듯한 피로를 느꼈다.
‘아무것도 안 보고 싶군. 아무것도 안 듣고 싶고 말이야.’
그 후로 이치지쿠는 돌연 숙소에 틀어박혔다. 두꺼운 커튼을 빈틈없이 치고 모든 불을 다 꺼버렸다. 저녁엔 물론 해가 떠오는 새벽에도, 아침에도, 한낮에도 이치지쿠의 호텔 방은 어두컴컴했다. 게다가 이치지쿠는 조금의 새어드는 빛도 기피하고 싶은 듯 눈을 감고 살았다. 일어나서도 눈을 감고 걸어 다녔다. 물을 마실 때도 눈을 감고 있었다. 벽을 손으로 짚고 다녔고, 반경 몇 걸음 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했다. 룸서비스를 받기 위해 문을 열 때에도 손잡이를 더듬거렸다. 눈을 뜨고 산 게 아주 오래전인 것처럼 굴었다. 그러다가 실수로라도 눈을 뜨는 때면 도망치듯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며칠을 지냈다.
이치지쿠는 문득 여기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홋카이도에, 오타루에, 설원에, 넘실거리는 인파의 한가운데에, 내가 찾고자 한 것은 없다. 깨어있어도 잠든 것처럼 눈을 감아도, 모든 소리와 빛을 피해 다녀도, 그것을 온몸으로 샤워하듯 마주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치지쿠는 눈을 뜨고 불을 켰다. 며칠 만의 빛에 눈알이 고슴도치가 되는 것처럼 아팠다.
이게 본다는 것의 고통이군.
이치지쿠는 널브러진 옷가지, 대충 챙겼던 케이스도 없는 칫솔 한 개를 넣었다. 그리고 옷가지 위에 작은 트리 모양 장식이 올라간 나무 오르골을 던져 넣고 트렁크를 닫았다. 오르골은 기념품 가게에서 샀다. 태엽을 감으면 플라이 미 투 더 문의 멜로디가 느리게 흘러나온다. 보편의 즐거움에 대한 공감을 위해 산 것이지만, 이치지쿠는 그게 자신의 마음에도 드는지, 아닌지 쉬이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쿠아리움의 아이스크림보다는 훨씬 나았기에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케부쿠로로 돌아간다.
눈이 녹아 회색 슬러시가 되어있는 곳. 한겨울에도 한여름에도 똑같은 스시를 파는 스시 가게가 있는 곳. 비일상이 혼재되어 일상이 간당간당하게 목숨줄을 유지하는 곳으로.
언 것
쾅쾅쾅. 한가로운 오전과 어울리지 않는 시끄러운 소리가 맨션의 복도를 울린다. 야츠모는 주변 면목은 생각도 않고 큰 소리를 냈다.
“오오우나바라!”
야츠모는 이틀이 멀다 하고 이 문을 두드려댔다. 물론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야츠모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안심하기 위해 담요며 쿠션 위에 앞발을 꾹꾹 문질러대는 고양이 같은 짓이다. 야츠모는 오늘따라 더 절박하게 굴었다. 한 번 더 문을 두드리기 위해 높이 손을 들었다. 그 손은 허공에서 멈추었다.
기적처럼 문이 열리고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야츠모 군.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이렇게 크게 소란을 피우면 어떻게 하지?”
야츠모는 헙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꼽을 수가 없었다. 이치지쿠는 반쯤 열린 문 뒤에서 평소와 같은 차림을 한 채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싣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야츠모의 ‘용건’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야츠모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이치지쿠는 답답하다는 듯 한 번 더 물었다.
“대체 얼마나 이 문을 두드려댔던 거야?”
이치지쿠는 이제 팔짱을 끼고, 문틀에 어깨를 기대고 섰다. 이유가 무엇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불손한 표정이다. 야츠모는 그 얼굴에 도리어 화가 나서 묻는다. 목소리에는 감정이 실려 크기와 어조가 들쭉날쭉했다.
“연락도 안 받고 뭘 했어.”
“여행. 알았을 텐데.”
“여행? ……. 그러니까 어디 간 건데.”
이치지쿠는 코웃음쳤다.
“내가 왜 말해야 하지? 대답해 보겠나, 소년?”
“……. 그럼 왜 오늘에야 돌아왔는지 대답해 봐, 오오우나바라. 내일이 무슨 날인지는 알아?”
야츠모는 이치지쿠의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가늘게 좁힌 미간과 흔들리는 눈동자가 큰 상처라도 받은, 말 그대로 소년의 눈 같아 이치지쿠는 명치 안쪽이 메스꺼웠다. 침묵했다.
“내일, 내 결혼식이라고.”
말 없는 이치지쿠에게 야츠모는 자신이 대신 대답하듯 말했다. 일렁이는 불꽃 같은 눈동자로 이치지쿠를 빤히 내려다보면서. 이치지쿠는 그날, 그 오전의 흰 봉투에 대해 떠올린다. 순식간에 청첩장을 받던 한가로운 카페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너무 보드라워서 축축하게까지 느껴지던 고급지로 된 봉투의 촉감과 안에 들어있는 얄팍한 청첩장의 두께와 무게, 그걸 받아 들자마자 아무 말도 나오지 않던 알 수 없는 감정까지.
아하, 그게 내일이로군.
이치지쿠는 기계적으로 생각했다. 야츠모는 텅 빈 눈으로 고장난 것처럼 멈춘 이치지쿠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이치지쿠가 현관 안쪽으로 뒷걸음질 친다.
“왜, 어디로 갔다 왔느냐고. 오오우나바라.”
야츠모는 으르렁거리며 재차 물었다. 날카로운 눈이 짐승처럼 형형하게 빛난다. 야츠모는 씨근덕거리는 숨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분노하고 날뛰며 이케부쿠로의 비일상에 동화되어 간다.
“그러니까, 눈을 보러 다녀왔다고.”
이치지쿠는 한 박자 늦게 초점을 찾는다. 야츠모에게 밀쳐진 자세 그대로 똑똑히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이치지쿠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눈이 많고, 그래서 보편적으로 인간들이 많이 찾는 오타루에 다녀왔다. 그 이상을 답해줘야 하는 이유도, 의무도 없다. 무엇을 찾아 떠났는지, 그래서 뭘 찾아오기는 한 건지 모르겠다고, 그런 구차한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한 도시에서 바보 눈사람 체험을 하고 왔다고는, 죽어도 말 못 하지. 이치지쿠는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야츠모는 이치지쿠의 코앞에서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이치지쿠는 마른침을 삼키며 메스꺼운 속을 진정시켰다. 한 걸음 더 뒤로 물리며 야츠모를 진정시키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말을 꺼냈다.
“소년, 무언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네 인생은 네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야. 서로…….”
이치지쿠는 말을 끝낼 수 없었다. 뒷걸음질 치던 언 발이 현관의 턱을 잘못 밟고 미끄러졌다. 힘없이 가는 발목은 불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휘청였다. 이치지쿠는 혀를 씹고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냈다. 야츠모는 순식간에 팔을 뻗어 이치지쿠의 등을 받아냈다.
“제발.”
야츠모는 휘청이는 이치지쿠의 몸을 받아내면서도, 이치지쿠가 사라진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치지쿠가 자취를 감추는 건 처음이 아니다. 사고로 친다면 수습 가능하고 흔한 사고 중 하나였다. 그런데 왜? 라는 물음에 도달하면, 스스로 대답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야츠모는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결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서 그렇다. 이케부쿠로 밖의 일상에 너무 물들어서 그렇다. 비정형으로 가득하던 변칙적인 인생에서 과하게 멀어져서 그렇다. 그래서, ‘사건’을 견디는 역치가 너무 떨어져서 그렇다.
‘아무튼.’
야츠모는 담담하고 여상하게 구는 이치지쿠의 태도에 굉장한 분노를 느꼈다. 짜증이 일어 부글거리는 속을 잠재워야 했다. 야츠모의 ‘단세포’가 생각을 그만하라 충동질했다. 야츠모는 방금 붙들었던 이치지쿠의 허리춤에 다시 팔을 밀어 넣고 강하게 당겼다. 고개를 들이밀고 이치지쿠의 얇은 아랫입술을 먹을 듯이 제 입술로 가두었다. 남은 손을 더듬거려 현관문을 닫았다. 맨션 복도에 쾅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길게 남았다.
이치지쿠는 야츠모의 거친 키스를 받아내는 게 전부였다. 야츠모는 이치지쿠의 입술을 이로 긁고, 세차게 빨아들이고, 거친 숨을 섞으며 힘을 주고 붙어왔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다시 혀를 길게 빼어 이치지쿠의 입술을 쫓았다. 이치지쿠는 야츠모의 팔뚝 옷자락을 붙잡고 거의 매달려 있었다. 한참을 그러다 야츠모는 겨우 입술을 뗐다. 말하다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고개를 교차하고 야츠모가 속삭였다.
“너를 보면 짜증이 나…….”
이치지쿠는 무슨 말이든 하려고 했다. 하지만 야츠모는 조금의 틈도 두지 않고 다시 입술을 맞부딪혔다. 혀와 입술이 섞일 때마다 가시처럼 까칠거리는 촉감과 타액에 녹은 엷은 피 맛이 함께 느껴졌다. 둘은 눈을 감고 키스하며 서로 다른 곳을 보았다.
이치지쿠는 이 키스조차 순탄하지 않은 것에 자조했다. 까슬거리는 입술과 피 맛이 섞인 키스라니.
야츠모는 이유도 모르고 이치지쿠가 야속했다. 사람이 결혼을 한다고 하면 화를 좀 내. 어딜 가면 간다고 말해. 겨우 얼굴을 봤더니 전이랑 똑같고……. 삽질하는 건 언제나 내 쪽이지.
이치지쿠와 야츠모는 좀처럼 박자가 맞지 않는 키스를 우악스레 이어갔다. 야츠모가 심술을 부리듯 굴면 이치지쿠는 겨우 쫓아갔고, 야츠모가 떼를 쓰듯 쫓아가면 이치지쿠는 달래듯이 입술을 모았다.
그러다 야츠모가 조금 누그러든 모습으로 먼저 고개를 물렸다. 입술이 떨어지자, 이치지쿠는 얼얼한 입가를 매만졌다. 이 누구 건지 모를 타액이 마른다면 버석거리고 따끔거릴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린 입술과 함께 답도 찾아오리라. 이치지쿠는 반짝 눈을 뜨며 야츠모를 다시금 마주했다.
“아아, 찾았네.”
이치지쿠의 한쪽 입꼬리에 희미하게 웃음이 비친다.
그 순간 야츠모의 얼굴은 파리하게 식어갔다.
갑작스러운 키스를 폭력처럼 퍼붓고, 분노를 잃고 나서야 돌아오는 감각에 야츠모는 당혹스러웠다. 신부에게 이 일을 숨길 수 없을 거라는 불안감, 그가 베풀었던 호의와, 평범함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삶과, 그 모든 것이 죽음으로 갚아야 할 빚이 되는 것과…….
그게 뒷전이 될 정도로 방금 이치지쿠에게서 빼앗다시피 한 키스가 좋았다는 것, 그래서 자신이 이치지쿠를 많이,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 그리고 그 깨달음에서 따라오는 어쩔 수 없는 짜증스러움.
이치지쿠에게 단세포 바보라고 불리기 일쑤인 야츠모가 처리하기에는 너무나 많고,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야츠모는 간단히, 죽어도 좋겠다고 이 모든 것들을 일갈했다.
이치지쿠 때문에 죽는다. 이번에는 진짜로.
그리고, 그래도 괜찮다.
야츠모의 얼굴에는 열꽃이 피기 시작했다. 파리했던 얼굴에 다시 피가 몰리고, 울긋불긋하게 변했다. 야츠모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지척에 있는 이치지쿠를 바라본다.
이치지쿠는 야츠모의 셔츠 깃을 멱살 쥐듯 꽉 잡았다. 비릿하게 웃는다. 단지 키스할 때 맛보았던 피의 뒷맛 때문은 아니다. 새 셔츠네. 비싼 거. 각 잡힌 칼라, 매트한 광이 나는 단추, 주름 없이 팟팟한 고급 원단.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신부’가 사 준 셔츠겠지. 그래, 어쩐지 촌스러운 하와이안 무늬가 보이지 않더라. 쥐색의 얌전한 드레스 셔츠를 내려다보면서 이치지쿠는 야츠모의 입술을 핥아 올렸다.
“……. 왜 이래?”
야츠모는 돌연 다가오는 이치지쿠의 키스에 응하는 대신 질문했다. 그리고 이치지쿠는 야츠모의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가락 관절이 하얘질 정도로 야츠모의 셔츠 앞섶을 꽉 쥐고 키스를 이어간다.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고, 입을 열길 종용하며 집요하게 빨아들인다. 이치지쿠는 고개를 바짝 들고 야츠모의 입술에 매달린 채, 신경질적으로 제 셔츠 단추를 툭, 툭 풀었다. 이따금 힘이 앞서 단추에 매달린 손가락이 헛돌았다. 점점 벌어지는 이치지쿠의 셔츠 안으로 판판한 가슴과 그 위로 불툭 선 유두가 보였다.
“난 답을 찾았어, 야츠모 군. 여행을 갈 게 아니라 집에 얌전히 붙어있을 걸 그랬지.”
“무슨 소리야?”
숨소리가 가득 섞인 목소리로 야츠모가 반문했다.
“너와 자야 할……. 명확한 이유가 생겼어.”
묘한 기분을 느낀다. 찬 공기가 가슴팍에 닿으면서 근래에 느끼지 못했던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인간들은 소위, 이럴 때 꼴린다고들 하지.
‘이런 상황에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 알면, 야츠모 군. 너는 나한테 또 뭐라고 윽박지를까? 이상하다고? 변태라고?’
이치지쿠는 건조하게 웃음 짓는다. 완전히 어깨 아래로 셔츠 자락을 떨구며 집요하게 입술을 조른다.
아니. 너도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 소년.
둘의 사이는 뜨거운 숨과 급박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놓치면 안 될 것처럼 입술을 맞부딪히고, 야츠모는 이치지쿠를 연신 품속으로 당겼다.
야츠모는 드디어 땅에 발 붙이고 선 기분이다. 사선에 한쪽 발을 걸어두고, 비상식, 나아가 비정상이 파다한 이케부쿠로에 녹아드는 이 안정감. 이 정도의 말도 안 되는 일은 일어나야 했다. 불안함 속에서야 드디어 느껴지는 실재한다는 감각. 온 사방에서 왈츠처럼 울리는 사이렌 소리와 목뒤에서 빛나는 카이샤쿠의 날.
무겁게 눌러오는 야츠모를 견디기만 하던 이치지쿠는 알몸이 되어 야츠모를 집 안으로 인도했다. 거실에 있는 침대에 야츠모를 팽개치듯 눕힌다. 이치지쿠는 겨우 침대 헤드에 어깨를 기댄 야츠모의 위에 올라탔다.
적당하기만 한 난방은 사람을 나른하게 만드니까. 그래서 이치지쿠의 집은 언제나 조금 싸늘했다. 맨살에 닿는 그 냉기가 꽤 차가웠다. 이치지쿠는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시선만은 올곧게 야츠모에게 떨어진다. 핥는 듯이 목젖 언저리를 바라본다.
“뭐……. 하는데.”
“너 봐.”
야츠모는 헛웃음 쳤다.
“……. 자, 더 자세히 봐.”
좀 전의 이치지쿠처럼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푼다. 동물적인 움직임으로 어깨를 움직이자 셔츠가 벗겨져 침대 밑으로 흘러내렸다. 몸에는 크고 작은 자상이 가득했다. 이치지쿠의 목덜미를 두꺼운 손으로 덮고 끌어당긴다. 이치지쿠는 화석을 처음 보는 어린아이처럼 야츠모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시선이 옮겨가는 곳마다 이치지쿠의 찬 손끝도 함께 따라붙었다. 쭉 뻗은 콧날, 날카롭게 빠진 눈꼬리, 불거진 눈썹 뼈, 열렬히 키스했던 가는 입술. 피어싱이 있는 귓불, 그 밑으로 목빗근, 목젖, 쇄골과 어깨. 수많은 상처와 상흔을 지나 이치지쿠의 손끝과 시선은 점점 아래로 향한다.
이치지쿠는 야츠모를 ‘탐구’했다. 여기는 어떻게 생겼는지, 저기는 어떤 형태로 움직이는지. 그리고 야츠모는 단세포답게 이치지쿠의 행동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야츠모에게는 이 상황이 아주 에로틱하게 다가왔다. 탐구의 손길이 그에게는 애무와 크게 다를 것 없이 느껴졌고, 자연히 아래는 묵직하게 무게를 더했다. 이치지쿠의 손길은 색 짙은 유두와 탄탄하게 근육이 붙은 뱃전을 지나, 훨씬 더 아래로 내려갔다.
야츠모의 페니스를 쥔다. 이미 잔뜩 피가 몰려 단단하게 서 있었고, 팽팽하게 선 힘줄이 느껴졌다. 선단에는 끈적하고 맑은 방울이 맺혀있었다. 손이 닿자 야츠모는 얕게 숨을 들이켰다. 이치지쿠는 손안에 어설프게 가둔 것을 위아래로 천천히 쓸었다. 귀두까지 손바닥으로 감쌌다가, 뿌리까지 손을 내렸다. 집요하게 쳐다보며 손을 열심히 움직이다, 어느새인가부터 야츠모의 얼굴을 노려보듯이 시선을 꽂았다.
야츠모는 열이 올라 콧잔등과 볼을 붉혔다. 숨을 몰아쉬는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이치지쿠는 그 모습을 여전히 탐구하는 연구자의 얼굴로 눈에 담았다. 말뚝처럼 박힌 시선 아래 이치지쿠의 손은 점점 더 힘과 속도를 더했다.
야츠모는 아주 낮게 신음하다 오래지 않아 파정했다. 이치지쿠는 몇 번인가 더 손을 움직이며 야츠모의 후희를 눈에 담았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정액을 뾰족한 혀끝으로 핥아 올리면서도 순간순간 변하는 표정을 끈질기게 쫓았다. 이치지쿠가 혀를 굴릴 때마다 외설스러운 소리가 집 안에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야츠모는 몸을 일으키고 이치지쿠의 마른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다. 말끝에 열기가 눅진하게 묻어 있다.
“더……. 해?”
이치지쿠가 끄덕였다.
야츠모는 이치지쿠의 겨드랑이 밑으로 양손을 넣어 그를 불쑥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제 위에, 더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세우고 앉도록 했다. 한 손으로 이치지쿠의 둔부를 더듬으면서, 한 손으로는 여전히 빳빳하게 서 있는 자신의 성기를 이치지쿠에게 맞췄다. 이치지쿠는 뒤로 뜨거운 페니스가 적나라하게 닿아오는 감각을 느꼈다. 야츠모의 어깨를 쥐고 체중을 지탱한 팔이 파르르 떨렸다.
야츠모는 이윽고 이치지쿠의 살 없는 등허리께에 손을 올리고 당기듯이 눌렀다. 다른 손으로는 성기를 이치지쿠의 애널에 맞춘 채로 허리짓과 함께 빠듯하게 밀어 넣는다. 이치지쿠는 선명하게 느껴지는 고통과 동시에 먼 둔통처럼 찾아오는 쾌감의 시작에 입술을 깨물었다. 저절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 경련하면서도, 야츠모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 느껴지는 감각 이상으로 야츠모의 변화를 온몸으로 좇았다. 표정이 물드는 모양, 앓는 듯한 신음, 끓는 듯이 들려오는 목 안쪽의 으르렁거리는 소리, 손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불뚝 올라오는 핏줄과 힘줄의 모양. 그리고 점점 진해지는 몸의 냄새, 둘의 사지가 엉킨 형태, 선형으로 몸에 새겨지는 움직임, 점점 더 선명한 쾌감으로 다가오며 시시각각 변하는 촉감과 여전하게 공존하는 고통스러움.
야츠모는 어렴풋이 이치지쿠의 행동 기저에 탐구가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거기에 기꺼이 어울려야 했다. 야츠모는 미미하게 반응하며 자신을 대상화하는 이치지쿠의 시선 앞에서 허리를 쳐올렸다. 이치지쿠는 야츠모가 허릿짓 할 때마다 힘없이 흔들리면서도, 그 눈만큼은 야츠모에게서 떼지 않았다. 형형하게 빛나는 듯, 인류애의 어드메를 향한 가라앉은 눈.
이치지쿠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이따금 신음하면서도 야츠모의 표정만을 주시했다. 야츠모의 얼굴이 어느 선에서 변하지 않자, 이치지쿠의 얼굴에 의문스러움이 비쳤다. 이치지쿠는 야츠모의 허릿짓에 맞춰 얕은 움직임으로 제 하체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 왜?”
“네 얼굴이 좀, 전부터 변하질 않아서.”
“하아, 웃기는 소리를 하네…….”
“네가 느끼는 얼굴을, 보고 싶은데…….”
“그래, 그럼 잘 보던가.”
이치지쿠의 목덜미를 쥐고 제 얼굴 가까이 당긴다. 헤드에 완전히 고개를 묻은 모양새가 된 야츠모의 위로 이치지쿠가 등을 옹송그린 채 부딪힐 듯 얼굴을 가까이 했다. 이치지쿠는 그런 채로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둔부를 야츠모의 사타구니에 딱 붙인 채로 앞뒤로 뭉근히 움직이다가, 꾹 누르다가, 아주 끝까지 허리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찧기도 하고……. 확인하듯이 야츠모의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야츠모가 가장 표정을 일그러뜨렸을 때의 움직임을 계속해 나갔다. 점점 더 빠르게, 깊게, 아래에 힘을 주었다 빼기를 아주 섬세하게 신경 쓰면서. 이치지쿠는 굉장한 공을 들이고 있었다. 야츠모와의 섹스에. 혹은, 야츠모와의 섹스라는 인간 탐구의 한 장에. 쾌락이 치고 올 때면 이치지쿠는 신음하고 몸을 잘게 떨면서도 야츠모를 놓치지 않았다. 야츠모의 얼굴이 붉게 타고,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잔땀이 맺히고, 색기로 가득한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치지쿠는 눈으로 말뚝을 박아 넣듯이 꼼꼼히, 집착적으로 야츠모를 눈에 담았다. 그의 사정하기 직전, 사정하는 순간, 후희와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감정으로 물드는 그다음의 순간까지.
이치지쿠는 야츠모의 모든 순간을 탐구하는 이의 눈으로 익혔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야츠모를 계산하고 측정하는 가라앉은 눈빛은 여전했다. 이치지쿠는 야츠모가 후희에 젖어 얼굴을 일그러뜨릴 때, 야츠모에게 하체를 딱 붙인 채 몇 번인가 더 허리를 둥글게 움직였다. 손으로 제 성기의 끝을 쥐어짜듯이 야츠모의 아랫배에 누르면서, 이치지쿠도 뒤늦게 사정했다. 그때까지도 이치지쿠는 나른한 눈으로 야츠모를 눈에 담았다.
야츠모는 방금 섹스를 끝냈음에도 후련하지 않았다. 자연히 떠오르는 것은 신부의 얼굴과 이래서는 안 됐다는 후회, 그리고 마주해도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이치지쿠의 ‘눈’. 짙었던 쾌감은 간데없이 깜깜한 밤바다 같은 답답함만 남았다. 삼십 년을 수절한 사람처럼. 사흘 만에 물을 마시고 여전히 갈증하는 사람처럼.
이치지쿠는 반쯤 내리뜬 눈으로 야츠모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치지쿠의 성기는 힘을 잃고 축축해진 채 야츠모의 배 위에 늘어졌다.
완전히 깨달음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죽음’처럼 ‘수용’하는 일. 그리고 그 순간, 당장에라도, 그 결과가 눈에 보이는 물성이 있었다면 집어 던지고 싶은 폭력적인 충동에 사로잡혔다.
차라리 찾을 수 없는 여행을 계속하는 게 나았다. 무얼 받아들이란 말인가, 이제 와서, 이렇게 되어서, 모든 것이 다 일어난 다음에.
이치지쿠는 고개를 돌렸다. 초라하게 식은 성기와 볼품없이 헐벗은 몸이 인류사 최악의 수치처럼 느껴졌다. 송곳을 손톱 밑에 꽂는 기분으로 말했다. 위태롭게 존재하던 이치지쿠의 어떤 것이 함몰했다.
“결혼, 축하해.”
청첩장을 받았을 때부터 확실하게 예감했다. 그 촉감과 무게가 완벽하게 말했다. 모든 것은 피할 수 없고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너는 네가 원하고 바라 마지않던 평범함을 찾아 열차에 올랐고, 발을 내딛기 시작했고, 나는 여전히 이 이케부쿠로의 한가운데에 남아 비일상이라는 구멍이 뚫린 보트에 타 있노라고.
야츠모는 텅 빈 웃음을 흘렸다.
“괘씸하다더니, 이제 와서……. 축하를 한다고……. 지금, 너랑 나랑 섹스했잖아. 아직 빼지도 않았는데……. 지금.”
야츠모는 이치지쿠와는 다른 예감을 한다. 이 일은 영원히 악몽으로 남을 거라고. 죽을 때까지 잊을 만하면 꿈에 나타나 자신을 괴롭게 할 거라고. 야츠모는 심장이 떨어지는 것처럼 절망을 체감했다. 마른세수를 하자 손끝에 다 식은 땀이 불쾌하게 묻어났다.
이치지쿠는 말없이 야츠모의 위에 앉아 간신히 몸을 세우고 있었다. 야츠모는 그런 이치지쿠를 향해 몸을 일으키고, 찬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럼……. 축하 선물이라도 줘. 아직 안 줬잖아.”
결혼 전에 따로 많이들 받는대. 야츠모가 덧붙였다. 그리고 이치지쿠의 맨 허리를 빈틈없이 당겨 품에 가뒀다. 천천히 허리를 흔들기 시작하고, 금세 추삽질에 속도를 더했다. 몸짓이 급해지는 만큼 이치지쿠의 안에서 야츠모의 페니스는 그 부피를 늘렸다. 이치지쿠는 눈을 감고 야츠모의 목에 매달리듯 양팔을 감았다. 탐구를 멈추고 행위에 집중했다. 볼품없이 흔들리면서, 땀에 엉겨 붙기 시작하는 머리칼이 답답하다고 생각하면서, 꽉 잡힌 등허리가 괴물의 손아귀라도 되는 것처럼 답답하다고 느끼면서. 몰려오는 쾌감에 집중하면 차가웠던 몸이 금세 달아올랐다. 뒤늦게 사정했던 종전과 달리, 성기는 빳빳해지고 금세 쌀 것처럼 사정감이 몰려왔다. 그러는 중에도 다른 생각이 들 것 같으면, 이치지쿠는 일부러 입을 열어 쉼 없이 올라오는 교성을 그저 입 밖으로 흘렸다. 이치지쿠와 야츠모는 확실하게 섹스하고, 교접하고, 감히 사랑이라 이름붙일만한 동물적인 행위를 나누고 있었다. 몰두했다는 감각, 완전히 쾌감에 잠식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편, 이치지쿠는 서글프기도 했다. 그 모든 행위와 쾌감, 시너지에도 불구하고 지금을 타자他者처럼 받아 쓰는 유체의 자신이 있었다.
잠자코 받아들인다니. 아니지, 이건. 그래, 내가 할 만한 일이 아니야. 변칙이지.
이치지쿠는 야츠모의 단단한 어깨에 매달려 두 번째 사정을 뱃속에 받아냈다. 그리고 동시에 토정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사지를 얽은 채로 말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각자의 후희를, 후회를 음미했다.
이치지쿠는 흥미를 잃었다고 스스로에게 선언했다.
야츠모는 이 갈증이 영원히 갈 것임을 받아들였다.
먼저 몸을 일으킨 건 이치지쿠였다. 야츠모는 그저 이치지쿠가 침대 위에서 균형을 잃지 않도록 허리에 손을 얹어 도왔다.
둘은 사무적인 태도로 나란히 침대에서 벗어났다.
야츠모는 욕실로 들어가서 치부와 손을 씻었다. 가장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손을 한 번 더 씻었다. 거울 속에는 흐트러진 모습의 자신이 있다. 야츠모는 스스로를 힐난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충동을 애써 잠재웠다.
야츠모가 거실로 돌아오자, 이치지쿠는 알몸인 채 도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리 한쪽은 덜렁 침대 아래로 떨어져 있는 게 꼭 텐션을 잃은 관절 인형처럼 보였다. 야츠모는 떨어트린 셔츠를 주워 입었다. 처음과는 다르게 구겨지고, 볼품없었다. 광택이 흐르던 고급 드레스 셔츠는 지금 구질구질하게 변해 있다. 복잡하게 밀려오는 감정을 삼키듯이 무시한 채 야츠모는 이치지쿠를 일으켜 세웠다. 맨다리 사이로 자신이 사정한 정액이 흐르는 게 보였다. 야츠모는 못 본 체하고 이치지쿠에게 옷을 입혔다. 셔츠에 팔을 꿰이고, 속옷과 바지를 추켜올리고, 벨트를 채웠다. 솜씨 없는 어린 주인에 의해 옷이 입힌 인형처럼 볼품없었다. 온몸에 잘못 얽어붙은 옷가지가 불편하기만 했다.
“너 때문에 언젠간 내가 죽겠다.”
체념하듯 말한다. 야츠모는 엉망으로 옷을 입은 이치지쿠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어떠한 말도 더 붙이지 못하고 돌아섰다. 맨션 복도에 다시 쾅 닫히는 문 소리가 울리고, 도어락이 잠기며 기계음을 냈다. 이치지쿠는 고요한 이명과 함께 집에 남겨졌다. 야츠모가 떠날 때까지 이치지쿠는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치지쿠는 사 차원으로 된 감정의 골에 서있는 것 같았다. 시시각각 느껴지는 감정들은 모두 다르고,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시간의 흐름이 전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뇌를 강제로 십 퍼센트쯤 쓰게 된 사람처럼, 미쳐버릴 것 같은 동시에 너무나 고요했다.
이치지쿠는 야츠모가 말 그대로 몸에 입혀놓기만 한 불편한 옷을 전부 그 자리에서 다시 벗었다. 그리고 야츠모가 손과 치부를 씻은 욕실로 향했다. 가장 뜨거운 물을 욕조에 채웠다. 그리고 굳이 그 물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식을 때까지 알몸으로 서 있었다.
물이 식고 나서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뒷머리까지 물에 잠기고, 넘친 물이 욕실 바닥에 눈물처럼 콸콸 흘러내렸다. 뒤에서 울컥울컥 비집고 흘러내리는 정액과 죽죽 쳐지는 몸을 견뎌내며 오랫동안 씻었다.
물에서 나온 후에, 이치지쿠는 다시금 이케부쿠로에서 자취를 감췄다.
「오오우나바라」
「너 괜찮아」
이케부쿠로 밖의 어딘가에서, 이치지쿠는 야츠모의 문자를 무시했다. 그날, 총 다섯 통의 문자를 무시하고 여덟 통의 부재중 전화를 만들었다.
이치지쿠는 사라짐으로써 온몸으로 외쳤다. 오오우나바라 이치지쿠의 세계는 융해와 폭발을 경험했노라고. 진정으로 초신성과 블랙홀을 목도하고 있노라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그만의 섬세하고, 복잡한 방법으로.